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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과학연구소(ADD)> "우리 무기 우리 손으로” 자주국방·방산 강국 ‘두 토끼’
    • 작성일2018/08/02 09:07
    • 조회 394

    2018-08-01

    국방일보

     

    대한민국 정부는 1969년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의 발표에 따른 주한미군 철수와 북한의 각종 도발 및 위협에 맞서 자주국방을 천명하고, 향토예비군 250만 명의 무장과 국군현대화를 위한 방위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육성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월 6일 국방부 산하에 무기 개발을 위한 국방과학연구소(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무기 개발에 뛰어들게 됐다. 우리 군이 무장할 무기는 우리가 직접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방위산업시대의 개막이었다. 
    박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부르짖고 국방과학연구소를 긴급히 설립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북한은 1960년대 초부터 4대 군사노선을 표방하고 전쟁 준비를 마친 상태였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북한의 전력에 맞설 수준이 못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에 갓 취임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 스스로가 해결하라”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한 후 일방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했다. 그때 우리나라는 베트남에 5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파병하고 있었다. 베트남 파병 당시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할 경우 반드시 사전에 협의하기로 약속했음에도 미국은 일방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통보했다. 그리고 미7사단 철수에 이어, 마지막 남은 미2사단마저 5년 이내에 철수하겠다고 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전력상 커다란 공백이 생겼다.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해 아무런 준비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맞은 최대의 안보위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소총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무기생산의 후진국이었다. 국군이 사용하고 있는 개인화기부터 대포, 전차, 전투기 등 모든 무기와 장비들을 미국으로부터 도입해서 사용하던 때였다. 한마디로 몸만 국산이고, 그들이 운용하고 있는 무기와 장비는 모두 미국 제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한미군 철수가 현실화되고 보니 박정희 대통령은 난감했다. 늦었지만 우리도 무기 개발에 나서야겠다고 판단했다. 자주국방이었다. 그래서 국산 무기를 개발할 국방과학연구소 설립을 긴급 지시했다. 소장은 장관급으로 하고, 부소장은 차관급으로 했다. 그만큼 국산 무기 개발이 중요했고 시급했다. 초대 소장에는 육군중장 출신의 군 원로인 신응균 장군이, 그리고 부소장에는 공군작전사령관을 역임한 소장 출신의 윤응렬 장군이 임명됐다. 무기 개발에 일가견이 있는 소신파 장군들이었다. 그리고 청와대 내에 무기 개발을 지휘 감독할 경제2수석비서관실을 설치하고 오원철을 비서관에 임명했다. 대통령이 직접 이를 관장하겠다는 의지였다.
    국방과학연구소에는 육·해·공군사관학교에서 박사급의 유능한 교수들을 연구원으로 초빙해왔다. 당시 국내 최고의 이공계 출신 엘리트들이었다. 연구진이 갖춰지자 박 대통령은 오원철 비서관에게 우리 군이 사용하고 있는 기본화기인 소총·기관총·지뢰·박격포부터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총구가 갈라져도 좋으니 1개월 이내에 시제품을 만들라”고 했다. 워낙 빠르게 진행된 사업이라 ‘번개사업’이라고 했다. 이를 담당하는 부서도 일명 ‘번개사업본부’로 통했다. 
    번개사업이 어느 정도 진척이 되자 이번에는 미사일 개발에 들어갔다. 당시 북한이 무장하고 있던 프로그(Frog)-5 미사일은 사정거리 50-60㎞로 휴전선에서 40㎞ 떨어진 서울을 충분히 타격할 수 있었다. 이에 평양을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 200㎞의 미사일 개발을 지시했다. 그렇게 되면 북한도 함부로 전쟁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사일 개발은 북한에 대한 전쟁억제 수단이었다. 
    미사일 개발사업의 명칭은 보안상 ‘백곰사업’으로 불렀다. 국산 미사일 개발 사업은 국방과학연구소의 ‘항공사업본부’에서 맡아 추진했다. 대통령의 무기 개발 명령을 받은 국방과학연구소는 그때부터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밤낮도, 휴일도 없이 무기 개발에 몰두했다. 불면불휴(不眠不休)였다. 가족들에게조차 행선지를 알리지 못하고 합숙에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연구원들에게 휴식과 퇴근은 사치였다. 무기 개발은 고난의 여정이었다. 무기에 대한 설계도가 전혀 없으니, 개발할 무기를 하나씩 분해해서 조립해 가며 부품에 대한 제원을 산출하고, 이에 따라 설계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설계도를 따라 무기를 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제품은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연구진들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무기를 개발해 나갔다.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들었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국군의 기본무기와 장비 개발을 담당했던 번개사업본부는 소총·기관총·수류탄·박격포·지뢰 등을 신속히 개발했다. 그리고 1977년에는 포병의 105㎜와 155㎜ 곡사포를 생산하고, 500MD헬기를 조립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때 한국형 전차인 K1 전차도 만들었다.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이후 7년 만에 소총 하나 만들지 못하던 대한민국이 대포 생산에 이어 헬기와 전차를 만드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미사일 개발은 험난했다. 미군의 지대지미사일인 나이키허큘리스(Nike-Hercules)를 모델로 삼아 분해와 조립을 수없이 반복하며 개발에 몰두했다. 모든 것이 험난한 과정이었다. 그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해결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차츰 성과가 나타났다. 1976년에는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지상연소시험장과 유도탄 연구 및 생산 시설을 대전에 설립했다. 그때 박 대통령도 참석해 노고를 치하했다. 그 무렵 항공사업본부도 대전기계창으로 명칭을 바꾸고 미사일 개발에 더욱 매진했다. 드디어 1977년 백곰미사일의 축소형이 제작되어 시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1978년 9월 26일 박 대통령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합참의장과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백곰미사일 발사가 안흥시험장에서 있었다. 발사시험은 대성공이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7번째 미사일 개발국이 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짧은 역사에도 국군이 사용하는 무기와 장비를 국산화하고, 사거리 200㎞에 달하는 지대지미사일까지 개발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방위산업을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박 대통령의 집념과 리더십 그리고 국방과학연구소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의적인 연구 덕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국방과학연구소는 자주국방과 방위산업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앞으로도 국방과학연구소가 최첨단 무기와 장비 개발에 더욱 힘써 세계 으뜸의 연구소로 거듭 발전하기를 60만 국군과 함께 기대해 본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위원